[사물의 재구성] 프롤로그: 취향이 없어도 에디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자기 얘기 못하는 에디터의 일상 관찰 에세이
<관찰력 기르는 법>의 저자 사도시마 요헤이는 ‘일어나버린 모든 일은 옳다’,고 썼다. 인생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은 사후적 해석에 의해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 된다. 어떤 일의 의미를 결정짓는 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 즉 관찰력에 달려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내 인생에 일어나버린 일, 그중 가장 당혹스러운 것을 뭐라고 정의해야 좋을까. 나의 판단이 옳을지 오래 고민했으나 역시 ‘에디터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쩌다 에디터가 되었을까.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을 에디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변 사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더는 미루지 못하고 지금 그것을 시작하게 된 건 이 해묵은 ‘자기 불화’ 때문이다. 도대체 그때 나는 왜 에디터라는 직업을 갖고 싶었을까.
영혼 없는 에디터의 탄생
지금 같은 대 브랜드의 시대가 찾아오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서로의 취향에 관해 묻곤 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버거웠고, 어쩐지 그 질문에 지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가장 좋은 것, 가장 희귀한 것을 찾아내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나의 음악적 선호, 좋은 음식의 기준, 욕망하는 옷의 디자인, 좋아하는 호텔 객실 타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좋아함’의 목록은 절반쯤 진실이고, 절반쯤 거짓이다.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 언제든 갱신될 수 있는, 한시적 관심의 모음집. 스스로 유행에서 벗어나 있다고 으스댔으나 실상은 언제나 그 안에서 가장 안전한 지대를 찾아 헤맸을 뿐인.
무언가를 좋아하는 흉내를 계속 낼 수 있었던 건 불행하게도 내가 주변의 다른 친구, 동료들보다 ‘좋은 것’을 먼저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덕분이었다. 새롭게 소비할 물건과 서비스, 공간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왔고, 나는 크게 애쓰지 않아도 그것 중 무엇이 가장 비싸고 이슈될만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 그럭저럭 해온 글쓰기는 그것이 정말로 비싸고, 중요한 이슈인 것처럼 포장할 수 있게 해줬다. 나 자신도 속을 만큼. 좋아하는 게 딱히 없어서 오히려 무엇이든 좋아하는 척할 수 있는 이 재주는 상업적 글쓰기 영역에서 꽤 요긴하게 쓰였다. 나는 그렇게 에디터가 됐다. 여태 많은 매력적인 거짓말들을 겨우겨우 써내며 커리어를 쌓았다.
그놈의 ’취향’, 그것 때문에 밥줄 끊기게 생겼어
하지만 모든 것이 흔들린다. 더 이상 괜찮은 척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어째서 이렇게 돼 버렸지, 이제 와서. 매거진의 직업인 탐구 저서
설상가상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더 이상 마음 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글을 쓸 수 없게 돼 버렸다. ‘취향도 모호한데, 애정이 없는 게 작업에서 티가 나는 유형’이라... 트렌드 변화에 휩쓸리는 업종의 직업인으로서 이것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이런 나를 에디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걸까. 아니, 나 앞으로도 에디터로 일할 수 있는 걸까? 매몰비용과 기회비용 사이에서 생각한다. 그만둘 것이
사랑은 너무 멀어, 우선 관찰부터 시작하자
사랑하는 법을 다시 공부하는 것.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다시 써보는 것. 내가 선택한 에디터로서 최후의 자기계발 과목은 이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를 사랑해 보려 하니, 이게 너무 막막한 거지. 같은 인간을 사랑하는 일도 매일 새롭게 벅찬데 갑자기 또 다른 존재들을 ‘사랑’씩이나 하려니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단위를 <관찰>로 낮추고, 나 자신과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사물들부터 하나씩 <관찰>해보기로 했다. 바라건대 이 관찰일지가 만약 그다음의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내 사랑의 여정은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관찰 > 발견과 재정의 > 각인 > 사랑 > 취향
아니, 아니다. 이제부터 ‘그럴싸한’ 같은 표현은 금지다. 다시 쓰겠다.
“또 모르지, 제법 나다운 정물화 한 점을 그릴 수 있게 될지도.”
문희경
자기 얘기 한정 실어증에 시달리는 텍스트 노동자. 대체로 에디터로 불리며 일해왔지만 안맞는 옷임을 깨닫고 뒤늦게 자아 탐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