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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재구성] EP.3 운동화의 재구성

글 문희경



〈사물의 재구성〉
자기 얘기 못하는 에디터의 일상 관찰 에세이





생각이 고일 땐 대부분 걷지 못할 때다. 올여름은 유독 힘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더위 때문이었나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다. 움직임이 적었다. 밤낮 없이, 평일과 주말도 없이 일하느라 올해는 여름을 다 지새웠다. 피서의 추억도, 시원한 아메리카노의 감각도, 남아있는 게 없다. 시간은 흐르고, 이미 가을이 된 계절은 벌써 옮겨 갈 준비를 한다. 이런 식으로 날로 먹은 계절이 몇 개였는지. 세상에 사계절이 존재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걸을 수 있는 계절과, 그렇지 않은 계절이 존재할 뿐. 바이오리듬은 걸음 수에 따라 오르고, 내리길 반복한다.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면 나가 걷는다.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좋은 습관 중 하나. 좀 더 멋지고 그럴싸한 것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술도 담배도, 모두 일을 해치우듯 마시고 태워대는 나를 보면서 관뒀다. 무엇보다 그 두 가지는 이미 고인 생각을 다시 내 안으로 흐르게 만드는 역류의 운동성을 가지고 있더라. 앉은 자리에서 모두 태운 한 갑의 담배보다 나를 살린 건 동네를 방황하던 시간이었다. 어떻게든 걷다 보면 답이 나왔다. 정리할 일도, 버릴 관계도. 무언가를 정리하고 버려야 할 순간은 수시로 찾아왔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걸을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 늙수그레한 운동화 몇 켤레만 차 있는 신발장엔 그런 사연이 있다.

잘 걷기 위해서는 잘 맞는 신발을 골라야 한다. 그러려면 싫더라도 본인의 발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살펴야 한다. 양발의 아치는 얼마나 높고 낮은지, 발 볼의 넓이는 어떤지, 살짝 더 큰 짝발은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쪽인지. 나는 낮다 못해 무너지다시피 한 아치와 넓은 볼을 지닌 오리발. 남들이 쉽게 사서 신는 브랜드 슈즈 대부분에 해당 사항이 없다. 대부분의 제품이 앞코가 가지런히 모이는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꿈이었던 페라가모의 스틸레토 힐은 고사하고, 단정한 로퍼 한 켤레도 쉽지 않다. 100개의 식이 알레르기를 가진 먹방 유튜버 꿈나무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메뉴가 참 많은데, 먹을 수 있는 게 없네.’

신을 수 없는 신발들을 제하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아웃도어 슈즈다. 트래킹화나 러닝 슈즈들. 뉴발란스, 알트라 러닝, 아식스, 아디다스의 일부 라인. 일상용 운동화는 언제나 단출하게 이 안에서 결정된다(스포츠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나이키는, 놀랍게도 칼발 소유자들을 위한 브랜드다). 그렇다 보니 운동화 매장에 들어설 때마다 TPO에 죽고 사는 직업을 갖지 않은 데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은퇴 후 커리어에 대한 관심을 헬스케어 분야로 두게 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극강의 실용성이 포멀함의 기준이 되는 세계. 나는 언제나 그곳을 꿈꾼다.

단출한 선택지와 편안한 착화감. 이 두 가지 명쾌한 옵션을 남기기까지 버린 신발이 몇 켤레쯤 될까. 운동화만 신고 산 지 5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양쪽 뒷꿈치와 새끼발가락은 외상을 기억한다. 패였다, 덮이고, 패이고, 또다시 덮이던 시간들. 분홍신의 잔혹동화는 실화였을지도 모른다. 서고, 걷기 위해 존재하는 발을 엉뚱하게 포장지로 싸매다 보면 나 역시 엉뚱한 곳에 가 있곤 했으니까. 분명 좋은 사람으로, 멋진 사람으로,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을 텐데. 그 수많은 자리에서 누구와 함께 떠들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몸은 그곳에서 생긴 상처들을 기억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운동화를 신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도통 뒤꿈치가 까지는 날이 없다. 물론 너무 오래 신어서 뒤축이 헤진 걸 신을 땐 가끔 피를 보기도 하지. 그럼 그때가 이별할 때다. 운동화는 참 심플하다. 신발에 날 맞추지 않아도 되니까. 시절을 다한 모든 것들과의 이별이 이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삶은 신지도 못하면서 버리지 못하고 모셔둔 낡은 플랫 슈즈처럼 께적지근하고, 쿰쿰하다. 내일은 꼭 버려야지. 내일은, 버릴 수 있을까. 늦어도 겨울이 오기 전엔 신발장 정리를 해야지.




문희경
자기 얘기 한정 실어증에 시달리는 텍스트 노동자. 대체로 에디터로 불리며 일해왔지만 안맞는 옷임을 깨닫고 뒤늦게 자아 탐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