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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재구성] EP.2 욕조의 재구성

글 문희경


<사물의 재구성>
자기 얘기 못하는 에디터의 일상 관찰 에세이

만성 관절염 환자에게 욕조는 자동제세동기(AED)다. 거의 다 죽어갈 때 쓰는 마지막 치트키. 생각보다 진통제는 전신 통증에 효과가 약하기 때문이다. 염증과 통증은 불시에 찾아온다.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며칠간 일이 많았거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다면 길게 목욕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물의 온도는 통상 반신욕을 할 때 권장되는 수준보다 좀 더 높아야 한다. 대략 45도에서 50도 사이로, 약간 뜨겁다 싶을 만큼 데워진 물을 가슴 아래쯤까지 충분히 받는다. 물이 식는 것을 막기 위해 욕조 덮개가 있으면 더 좋다. 만족스러울 만큼 물이 찼다면 수도꼭지를 잠근 뒤 한쪽 발부터 엉덩이, 허리, 가능하다면 목까지 조심스럽게 담가 보라. 물이 피부를 감싸는 즉시 통증의 강도가 약해지는 마법 같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조금 더 기다리면 모공 사이로 진득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됐다. 그 땀은 당신이 느꼈던 통증이다. 우울이고, 슬픔이다. 땀이 빠져나가는 만큼 통증이 줄어든다. 우울은 수용성이랬나, 정확히 말하면 ‘고통’은 수용성이다. 그것도 과학적으로.


젊은 만성 관절염 환자와 욕조의 상관관계
아직 관절염 환자가 되기 전이던 회사원 시절, 내게 목욕은 내향인이 즐길 수 있는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다. 당시 나는 욕탕에 앉아 땀 빼는 일을 ‘독 뺀다’고 표현했는데, 그렇게라도 쌓인 울분을 녹여내지 않으면 다음 날 출근할 수 없었다. 일을 하다 보면 꼭 진흙탕에 구른 것만 같은 불쾌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곤 했다. 그 시절엔 왜 그토록 화가 많았는지. 1인 가구는 욕조가 있는 집에 살기가 쉽지 않으니 동네 대중목욕탕을 즐겨 찾았고, 참다못해 돌아버릴 것 같을 때면 <목욕 여행>을 떠났다. 사람과 서울을 피해 여주, 강릉, 청송, 여수, 부산 등 전국 각지의 사우나와 객실 욕조를 전전하며 나를 정화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엔 회사형 인간이 되는 데 실패했다. 나는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왔고, 미처 다 못 뺀 독은 피를 타고 돌아다니다 손가락이나 어깨, 골반, 무릎, 발목 뼈마디에 염증으로 나타났다. 저주 같은 통증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붓는 날은 타자를 치기는커녕 머리도 감을 수 없었다. 나의 회사원 자아를 연명시키기 위한 일종의 레저 활동이었던 목욕은 내게 일종의 제세동기가 됐다.

목욕은 생리학적으로 두 가지 관점에서 진통 효과가 있다. 첫째, 심혈관계에서의 작용. 따뜻한 물은 근육을 이완시키고 혈관을 확장해 혈액순환을 촉진한다. 염증의 주요 기전 중 하나는 혈액순환 장애다. 따라서 피가 도는 속도가 빨라지고 혈류량이 늘면 염증이 개선된다. 둘째, 뇌신경계에서의 작용.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각(자극)은 생체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된다. 척추를 관통하는 척수신경에는 ‘척수시상로’라는 게 있는데, 신경이 뇌까지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고속도로다. 이 척수시상로는 통증 감지 신경과 온도 감지 신경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신경이 번갈아 가며 사용한다.

하나의 통로를 공유하는 두 가지 신경, 하나의 통로를 통과하는 서로 다른 신호. 당연히 척수시상로가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신호 총량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여러 자극이 동시에 들어오면 그중 더 강한 쪽의 자극에 먼저 길을 내준다. 무슨 얘기냐 하면, 관절 통증이 있는 사람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온도 감지 신경이 활성화하면서 척수시상로를 통과하던 통증신호가 끊기고 그 자리를 온도 감지 신호가 채우게 되는 것이다. 신경 통로에 정보량 과부하가 걸리면서 ‘뜨겁다는 감각’이 기능적으로 진통제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걸 신경의학과에서는 전문 용어로 ‘관문 조절 이론(gate control theory)’라 부른다고.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재활의학 쪽에 근골격계 면역질환자나 중추신경계가 마비된 환자의 재활을 위한 수 치료(Aquatic therapy)라는 게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셀프 수 치료를 한 것이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느낌적인 느낌’으로 물을 찾아 들어간 게 나를 살리고 있었다니. 인간의 DNA에 새겨진 생존욕구는 정말로 놀랍다. 어릴 때 목욕탕에서 봤던 ‘열탕 마니아’ 아줌마와 할머니들은 자가 임상으로 고도의 신경의학적 치료 요법을 터득한 거였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아쿠아틱 테라피가 조선시대에도 고급 의료 행위로 존재했다는 사실. 조선의 어의들은 아픈 임금을 온천물에 담가서 관절염은 물론이고 욕창도 치료했다는데, 대표적인 수혜자가 세종, 세조, 정조다. 뇌과학이란 것도 없었던 그 시절에 온천욕의 효능을 정확히 알고 썼다니, 새삼 동양의학이란 얼마나 신묘한 것인가…


목욕, 고통을 내주고 생각을 얻는 과정
여하튼 나의 척수신경이 감각 신호 교란으로 자가 진통 모드에 돌입하면, 나는 통증과 싸우느라 붙들고 있지 못했던 일상의 문제들을 다시 의식 세계로 소환한다. 안 풀리는 기획, 미처 답하지 못했던 질문, 몇 주째 벼르고만 있었던 독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택···. 몸을 물속에 방생해야 가능해지는 집중의 순간이다. 반신욕은 20~30분 내로 마쳐야 한다는 의학적 권고(?)가 있지만 내가 하는 건 반신욕이 아니라 목욕이므로 보통 한 번 들어가면 씻고 나올 때까지 1시간가량 걸린다. 그중 약 40분이 바로 물속에서 나의 의식 세계와 화해하는 시간이다. 참 신기한 건 위에 나열한 저 정신 활동들이 내가 ‘집중해야지’ 마음먹어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란 사실이다. 며칠을 골머리 앓던 질문들이 물에만 들어가면 해결된다. 앞서 목욕은 혈액순환을 촉진한다고 썼는데, 막혀있던 생각도 혈관을 타고 팽팽 도는 느낌이다. 생각에도 동맥경화가 있는 걸까. 먼 옛날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니었을 거다. 물속에서 누리는 자유는 놓쳐버린 중요한 생각의 단서를 다시 붙잡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대체로 목욕 직전까지 책상에서 하던 일들과는 별개의 맥락인 경우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재부팅 버튼’의 역할을 한다. 프리랜서로 살다보면 책상에서 빠져나왔는데 일에 대한 생각은 끝나지 않을 때가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더 집요하게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듯, 정신 작용의 연속성은 중단하려 할수록 세진다. 이럴 땐 외부 요소의 개입을 통해 주의 집중력의 관성을 끊어야 한다. 업무하고 완전히 상관없는 환경으로 몸을 옮기거나, 집중의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유레카! 목욕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능하게 해준다. ‘새로운 생각을 통해 기존의 생각을 몰아낸다.’ 무릇 번아웃은 생각의 속도와 체력의 싱크로율이 맞지 않는 상태가 지속될 때 찾아오는 법이다. 뇌과학, 인지과학 영역에서는 이렇게 자가증식 하는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무엇에 집중할 것인지를 바꿔가며 선택하는 연습을 ‘뇌신경가소성’을 교정하는 무의식 훈련이라고 부르더라. 고인 물은 필연적으로 탁해진다. 고인 생각도 그러하다.


지긋지긋한 나와의 싸움! 하지만 안할 수도 없다. (출처:침착맨 유튜브)

발상의 전환 과정이 자연스럽게 목욕 시간 내내 이어지게 하려면 일방적 자극으로 도파민을 쏠리게 하는 매체가 욕실에 없어야 한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 같은. 특히 물속에서 하는 SNS는 정말이지···. 그 세계의 영양가 없음과 유해함을 확장된 혈관으로 쏙쏙 빨아먹는 느낌이다. 가끔 책 읽을 에너지도 없이 지치면 목욕하는 40분을 강아지나 고양이 릴스와 함께 보낼 때가 있다. 그것도 나름대로 ‘머리를 텅 비우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효하지만, 소중한 목욕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인생에서 40분도 핸드폰 없이 쉬지 못한다니!’하는 자괴감에 개운하긴커녕 또 다른 종류의 조급함을 느끼게 된다.

당연히 스마트폰은 죄가 없다. 사용자인 내가 문제지. 현대인의 하루라는 게 ‘일’에 있어서는 TPO가 없지 않나. 갑자기 확인해야 할 업무 메시지나 전화가 올 수도 있고,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를 잽싸게 메모하려면 스마트폰 앱을 써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은 근처에 두되, 원칙을 정해야 한다. 내 경우 욕조와의 거리를 기준으로 목욕 용품들을 다르게 배치한다. 텀블러와 읽을 책은 욕조 덮개 위에 놓고, 탁상시계와 스마트폰은 욕조 밖으로 몸을 일으켜 몇 발짝 걸어야 하는 위치에 둔다. 왜 굳이 아날로그 시계를 쓰느냐고? 시간 핑계로라도 스마트폰을 먼저 찾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스마트폰에도 고유의 역할이 있다. 바로 음악을 틀어주는 스피커다.


까다로운 내향인의 사색을 위한 욕실 플레이리스트

아무 소리 없이 물 안에만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뭐가 됐건 욕조 안에 있는 동안엔 음악을 틀어 두는 편이다. 아마도 정적을 싫어하는 성향 때문인 것 같다. 일할 땐 너무 조용하면 잠이 오고, 목욕할 땐 너무 조용하면 잡생각이 의식을 치고 들어온다. 가령,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음악이 없으면 자꾸 욕실 문 바깥의 상황에 대해 신경 쓰게 된다. ‘빨래가 다 됐나?’ ‘방금 엄마, 아빠가 날 부른 것 같은데?’ ‘내가 방문을 잘 닫고 나왔던가?’ ‘남편은 왜 아직 퇴근을 안 하지?’ 이러면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은 불안으로 유쾌하지 않은 도파민이 생긴다. 쓸데없는 도파민은 진통에 도움이 안된다. 아쿠아틱 테라피의 치료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욕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목욕이 끝날 때까지 욕조 안이 나의 피안(彼岸) 세계가 돼야 한다. 말하자면 음악은 적막을 차단함으로써 현생 영역과 사유의 영역을 구분해 주는 청각적 가림막이다. 적막은 물 안에서나 밖에서나, 나를 집어삼킨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독서실과 도서관 특유의 압도적이고 강제적인 침묵 상황을 끔찍히 싫어한다.)

문제는 내가 소음도 싫어한다는 거다. 정확히는 사람 소리를 안 좋아한다. 읊조리는 가사가 많은 노래는 신경을 그쪽으로 곤두서게 해서 생각을 물속에 방생하는 과정을 방해한다. 그래서 보통 듣게 되는 음악은 가사가 없거나 알아들을 수 없고, 곡조를 전개하는 방식이 ‘아방가르드’하거나 ‘드라마틱’하지 않은 음악이다. 솔로나 심플한 악기 조합으로 이뤄진 재즈 연주나 피아노 선율 위주의 클래식 곡(*합창이나 교향곡은 안된다), 명상용으로 연주된 핸드팬 음악 뭐 그런 것들.

스포티파이, 멜론, 지니뮤직 같은 대표적인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이런 노래들을 듣기엔 모두 부적합하다. 사운드클라우드는 난해한 음원투성이이고, 최적의 선택지는 역시 유튜브 뮤직.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익숙한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하나 골라 전곡 연속 재생 모드로 틀어두면 1시간은 선곡 스트레스 없이 목욕을 즐길 수 있다. 여기에 음향 품질까지 따진다면 스마트폰 대신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일 수도 있지만, 적막을 차단하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음질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소 깽깽거리는 스마트폰의 음향도 욕실의 따뜻한 수증기를 타고 공명하기 시작하면 나름 그럴싸하다.

쳇 베이커, 스탄 게츠, 빌 에반스, 게리 멀리건, 엘라 피츠제럴드, 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빙, 류이치 사카모토, 하루카 나카무라, 조성진, 임윤찬, 손열음, 가끔은 몇 개의 영화 사운드트랙, 더 가끔은 유튜버 ‘지식의 취향’ 영상 시리즈. 이 익숙하고 빤한 레퍼토리 안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평안을 누린다. 좋아하는 순간은, 눈과 코를 제외하고 몸의 모든 부위를 물 밑으로 담글 때. 몸 전체가 따뜻해지고 난 뒤에야 용기 내 시도할 수 있는 이 잠수 흉내는 무한한 관용의 품으로 안기는 느낌을 준다. 야트막한 수면 아래로 굴절되어 희미하게 퍼지는 음악 소리를 들을 때면 언젠가 한 번쯤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노천탕 속에서 몸을 둥둥 띄워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바라건대, 그곳엔 아주 느린 템포의 명상 음악이 흐르기를.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평일의 중간, 오전 시간대에 방문해야지.


욕조에서 매번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막연한 미래의 온천 여행까지 상상하다 보면 물이 식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때가 목욕을 마칠 타이밍(대충 40분 이상이 흐른 시점)이다. 고통에서 나를 건져준 욕조 속 물은 몸을 씻어내는 용도로 끝까지 소명을 다하고 하수도로 흘러간다. 거품을 내고, 구석구석 때를 밀고 나면 어떤 껍질을 벗었다는 느낌이 든다. 목욕하기 전의 나를 벗겨낸 나, 통증이 줄어들어 마나(mana)를 회복한 나. 어떤 해답을 찾았거나, 회피하던 결심을 굳혔거나, 뒤죽박죽이던 인과관계를 심플하게 정리한 나. 목욕할 때마다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그 증거는 물 빠진 욕조에 남아있다. 엉킨 머리카락과 밀린 때 조각, 미처 다 내려가지 못한 비누 거품. 그것이 입욕 전 나의 실체다. 살아난 나는 책상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며 남아있는 과거를 꼼꼼히 지운다. 청소솔과 샤워기로 싹싹. 반짝이며 반사되는 욕실 등의 불빛을 보라. 다시 새로운 몸을 받아줄 준비가 된 욕조의 광택은 나의 자부심, 나의 의지, 부활의 상징이다.

달궈진 몸은 열을 식히기 위해 수분을 방출한다. 목욕 후 보습이 중요한 이유다. 샤워할 땐 귀찮으면 생략하기도 하지만, 목욕한 직후에는 꼭 바디로션을 꼼꼼하게 발라준다. 피부 유전에 있어서 외탁만 하다시피 한 나는 얇은 건성 피부 소유자인데, 자가면역질환은 피부를 더 건조하게 만들기 때문에 보습이 중요하다. 안 신던 가죽 워커에 공들여 구두 크림을 바를 때의 귀찮음과 비장함, 딱 그만큼의 심정으로 나를 코팅하며 새삼 살아있다는 건 얼마나 성가신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먹고 자고 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절차와 예방책과 조심성이 필요하지만, 수일이 지난 후엔 그 모든 노력의 시간이 이태리타월에 밀려나는 때 국수가 되고 말겠지. 그러니 너무 많은 것에 안달복달하지 말자고, 애쓰지 말자고 다짐한다. 어차피 때가 되어 하수도로 흘러 들어갈 운명이니까. 씻어내야 할 어제가 될 뿐이니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물 밖으로 나온 지금, 지금이라고.

고백하건대 사실 이번에 나 자신과 한 약속이 있다. 이 원고를 어쨌거나 포기하지 않고 완성하면 보상으로 목욕을 시켜주기로 한 것이다. 즉, 당신이 여기까지 읽어준 이 에세이는 여러 번의 감질나는 뜨거운 물 샤워와 똥 같은 자의식 분출을 몇 차례씩 반복하며 마감한 것이다. 오직, 걱정 없고 안락하며 자유로운 40분의 목욕 시간을 나 자신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 보상이냐 채찍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오직 자기 의지로 일해야 돈을 버는 프리랜서는 단순해야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만약 끝내 이번 마감에 실패했다면 나는 쓸쓸하게 시린 발을 오므리며 침대에 누워야 했겠지. 이번 에피소드에 할당된 실어증 재활훈련은 다행스럽게도 보상으로 끝난다.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물 받으러 가야겠다. 오늘은 욕조에서 한강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이제 막 수상한 사건 하나가 새롭게 펼쳐지려고 하는 대목이거든. 음악은 게리 멀리건의 Night lights로. 그거참, 아주 멋진 목욕이 되겠는데.



문희경
자기 얘기 한정 실어증에 시달리는 텍스트 노동자. 대체로 에디터로 불리며 일해왔지만 안맞는 옷임을 깨닫고 뒤늦게 자아 탐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