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시선] 속도가 남긴 것들

한국은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 말은 수사도, 감상도 아닙니다. 단지 한 세기를 가로지른 시간의 결을 곱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직한 진단입니다. 일제 식민지라는 타인의 지배 아래서 시작한 20세기, 해방의 기쁨은 곧 분단과 내전으로 바뀌었고, 폐허 위에 세워진 국가에는 민주주의가 아닌 군화발이 자리했습니다. 독재와 억압, 불신과 침묵 속에서 성장한 국민들은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다시 한번 ‘국가적 희생’을 요구받았고, 민주화를 외칠 때조차 피와 죽음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세계인이 열광하는 문화 산업, 최고 수준의 인프라와 기술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완벽한 반전 서사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완성된 외관 이면에서 발생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너무 빨리 겪은 사회는 정리되지 않은 기억과 감정, 정체성의 균열을 내부에 안은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느끼는 피로와 혼란은, 그 잔재입니다.

이 나라는 늘 '다음'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했고,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가난에서 벗어나야 했고, 독재를 무너뜨려야 했고, 세계와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쉴 틈 없이 달리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지만, '어디서 왔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돌아볼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런 시간의 축적은 정서에도 흔적을 남깁니다. 한국 사회는 빠르지만 깊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유연하지만 철학이 공허합니다. 멋은 있지만 뿌리는 얕습니다. 생각은 전략으로 치환되고, 감정은 마케팅 언어로 가공되며, 공감은 소비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공허감은 단순한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심은 리듬과 감각의 문제입니다.

한국의 디지털 세상은 그 심리를 압축한 전장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추락하고, 누군가는 신격화되며, 모든 판단은 속도전 속에서 이뤄집니다. 댓글 하나, 캡처 하나로 누군가의 삶이 뒤집히고, 모든 대화가 단죄 혹은 조롱의 형태로 귀결됩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익명성과 동조의 쾌감을 통해 정서의 발화구를 찾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큰 불신과 피로, 자기혐오를 되돌려 받습니다. 이 구조는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와 '정상성' 강박, 그리고 억눌린 감정의 배출 구조와 맞물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빠르고, 더 격렬하며, 더 파괴적인 가십과 낙인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 세기의 폭력적 압축 성장 끝에, 한국은 어느새 고령화와 인구 절벽, 경기 침체라는 새로운 생존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속도의 미덕은 더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감정을 다시 회복할 것인가.

<기획자의 시선>
프로젝트룸 대표 기획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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