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 글을 꾸준히 읽어온 사람이라면, 내가 미디어에서 의심 없이 전파되는 여러 담론들과 유행에 대해 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지했을 것이다. 이 반감은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는 감정적 거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이 구조 안에서 일해왔고, 그 메커니즘을 내부에서 관찰해온 사람으로서의 피로이자 경계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브랜딩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을 만드는 일’ 혹은 ‘본질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하지만, 이 글에서 조금 더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브랜딩은 이미지 메이킹이다. 그리고 이미지 메이킹은 필연적으로 편집을 수반한다. 편집이란 선택이며, 선택은 언제나 삭제와 왜곡을 동반한다. 결국 브랜딩은 ‘보여주고 싶은 나’를 중심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 지점에서 브랜딩은 마케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둘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표현 방식과 언어가 조금 더 세련되었을 뿐,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설득해야 하고, 각인시켜야 하며, 소비자의 인식 안에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문제는 이 이미지 메이킹이 더 이상 기업이나 제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인간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점점 더 당연하게 유통되고 있다. ‘호명 사회’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하라고 요구받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어떤 메시지를 가진 사람인가. 이 질문은 언뜻 보면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철학적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플랫폼과 시장이 개인에게 던지는 요구에 가깝다. 정의되지 않은 인간은 검색되지 않고, 검색되지 않는 존재는 곧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는 전제가 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개념은 이 흐름의 결정체다. 인간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 하나의 서사, 하나의 키워드, 하나의 콘셉트로 요약 가능해야 한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은 불편하다. 플랫폼은 명확한 태그를 좋아하고, 시장은 한 줄로 설명 가능한 캐릭터를 선호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스스로를 압축한다. 취향은 전략이 되고, 삶은 콘텐츠가 되며, 태도는 포지셔닝으로 번역된다.
나는 이것이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을 콘텐츠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콘텐츠는 소비되고, 소모되며, 트렌드에 따라 교체된다. 오늘 유효한 메시지는 내일이면 낡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콘텐츠가 된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그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재정의해야 한다. 멈추는 순간 도태된다. 이 구조는 겉으로 보기엔 ‘자기 계발’과 ‘자기 표현’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쉬지 않는 자기 착취에 가깝다.
몇 년 전 유행했던 ‘경제적 자유’ 담론을 떠올려보면 이 구조는 더욱 선명해진다. 누구나 노력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고, 시스템을 이해하면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강의와 코칭, 커뮤니티, 콘텐츠 등 자유를 약속하는 말들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소비와 불안을 만들어냈다. 퍼스널 브랜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너 자신을 브랜딩 하라”는 말은 결국 “너 자신을 시장에 맞게 가공하라”는 뜻으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진짜로 사라지는 것은 삶의 밀도다. 브랜딩 된 삶은 항상 외부의 시선을 전제한다. 이 선택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가 아니라, 이 선택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가 우선된다.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경험, 설명 가능한 태도, 공유하기 좋은 문장들이 삶의 기준이 된다. 그렇지 않은 시간들은 기록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 것은 점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만든 이미지에 잡아 먹히고 만다.
나는 ‘핵개인의 시대이니 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말이 ‘비가 오니 우산을 써라’, ‘홍수가 나니 떠내려가지 않게 대비해라’는 말과 구조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둘 다 하나의 전제를 깔아놓고 시작한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거대한 구조는 이미 결정되었고, 개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으며, 남은 선택지는 그 안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혹은 덜 고통스럽게 살아남을 것인가뿐이라는 전제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피할 수 없으니, 각자가 알아서 대비하라는 식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는 변화의 상당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플랫폼이 그렇게 설계했고, 시장이 그렇게 굴러가도록 만들었으며, 누군가는 그 구조에서 분명한 이익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책임은 지워지고, 개인에게는 오직 ‘대처 능력’만이 강조된다. 이 논리에서 질문은 사라지고, 대처 방식만 남는다. 그 결과 의심은 시대착오로 취급되고, 순응은 성숙한 현실 인식으로 포장된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으니 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하지만 모든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성숙함의 증거인가? 어떤 변화는 받아들이는 대신 의심해야 하고, 어떤 흐름은 따라가기보다 멈춰 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모든 인간이 브랜드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제만큼은, 너무 쉽게 합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브랜딩 자체를 전면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수단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문제는 수단이 목적을 잠식할 때 발생한다. 보여주기 위한 삶이 살아내는 삶을 대체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잃는다. 모든 사람이 영향력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고, 모든 삶이 콘텐츠가 될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조용히, 설명 없이, 포착되지 않은 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것은 도태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
나는 브랜딩이 개인 단위로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도덕적 비판이 아니라, 기능에 대한 판단이다. 브랜딩은 구조를 단순화하고 인식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이지, 인간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한 언어가 아니다. 그 도구를 개인에게 적용하는 순간, 사람은 설명 가능한 대상이 되고, 설명 가능한 만큼만 존재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때부터 인간은 살아가는 주체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이미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