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뭐든지 나누고, 구분 짓고, 선을 긋고, 이름을 붙이는 존재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감정과 역할, 관계와 정체성까지 이름을 붙이고 구획을 만들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이름을 먼저 만들곤 합니다. 그럴듯한 단어 하나만 붙이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름이 없는 것이 더 자유롭습니다. 이름은 외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자유(경계없음)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이름을 붙이고 맙니다. 직업에도, 관계에도, 정체성에도. 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 결국 우리는 무엇이든 갖다 붙이고 맙니다.
여기서 생기는 오류가 있습니다. 이름은 설명이 아니라 정의가 되기 시작하고, 정의는 곧 제한이 됩니다. 처음에는 나를 드러내기 위해 꺼낸 단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가두는 울타리가 됩니다. 이름은 안심을 주지만 동시에 나를 한 방향으로만 이해하게 만듭니다. 단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떤 단어도 동시에 무한한 해석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존재를 입증하고 기억에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이름 붙여 왔습니다.
특히 디지털 이후의 세계는 그 욕망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활동을 기록하고, 명명하고, 아카이브하며,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모든 행위가 저장되고 공유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단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설명되고 정리되어야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술가도, 디렉터도, 작가도, 모두가 이름을 붙여야 하고, 포지션을 가져야 하며, 맥락 안에서 해석 가능한 구조로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창작은 점점 더 자기 과시적인 형식을 띠고, 어떤 작업도 저자 없는 방식으로 남기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창작자’라는 정체성을 소비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창작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에 있습니다. 창작자와 비창작자의 경계는 흐려졌고, 누구나 생성하고, 누구나 소비하며, 누구나 편집하는 시대입니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을 쓴 존재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우리는 점점 분간할 수 없습니다. 창작은 더 이상 한 명의 저자에게서 완결되는 폐쇄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작업물 위에서 이루어지며, AI의 등장은 이 흐름을 앞으로 더욱 폭발적으로 팽창시킬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창작이나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존재의(질문의) 형태가 바뀌고 있습니다. 엔드 터치(Final-Touch)만 하는 것도 창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제 ‘볼 수 있다, 없다’로 나누는 이분법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물질의 형태보다 개념의 설계나 제시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그 개념을 누가 설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는(창작자는) 더 이상 지구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습니다.
이런 전환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신을 특정한 이름으로 설명하거나 정체화하는 일의 부자연스러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뭔가 명확해 보이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과도하게 고정시키는 장치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상태말입니다. 존재는 반드시 언어로 정의되어야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저자를 남기지 않아도 되는 작업 앞에, 증명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설명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고, 정의되지 않은 채로, 그저 작동하고 스며드는 것.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 시대에 우리는 들어와 있을까요? 이제는 ‘나’라는 이름을 중심에 두기보다, 이름 없이 흘러가도 무너지지 않는 구조 안에 머물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프로젝트룸 대표 기획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